시대를 담은, 우리를 닮은 얼굴들 – 국제경쟁1
국제경쟁 1 섹션에서는 시대를 담은, 우리를 닮은 얼굴을 만날 수 있다. <Mamma 마마>의 시노베는 마약 중독 문제로 어지러운 노르웨이 사회와 당사자 가족의 일원으로서 공허한 마음을 얼굴에 드러낸다. <Filipiñana 필리피냐나>에서 이사벨은 불균형한 세상의 무게를 견디는 약자를 비어있는 표정으로 대변한다. 딸의 장례식을 하루 앞둔 엄마의 모습을 그린 <Seventh Floor 7층>은 인물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아픔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불안정한 청소년의 이야기를 하는 <An Encounter 우연한 조우>에 등장하는 소년은 예기치 못한 위협에서 만나고 그것에서 벗어난 후 안도감과 허탈함, 그리고 새로운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을 공백의 얼굴로 맞는다. 좀비 사태 이후를 배경으로 한 <The Last Marriage 마지막 결혼생활>은 팬데믹의 시대를 연상하게 하고, 권태를 겪는 부부를 통해 우리의 일상적 모습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이브,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선 시노베는 딸 미셸의 부재를 깨닫고, 황량한 거리로 나가 미셸을 찾아다닌다. 인적이 드문 길가는 마약에 관한 이야기가 쉼 없이 오간다. 마약 중독자인 미셸이 항상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이어 마약 중독자들을 향한 비난과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 모든 말을 시노베는 그저 공허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뿐이다. 미셸의 어린 시절을 촬영한 홈비디오 영상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시간의 대비를 통해 현재의 비극을 강조한다. 영상 속 화목한 분위기 안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목욕하던 어린 미셸과 텅 빈 집 안 아무도 없이 흘러내리는 샤워기의 물소리가 대조를 이룬다.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아슬락 단볼트 감독의 생생한 연출과 실제 모녀 사이인 시노베 뮈렌, 미셸 뮈렌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연기가 만나 영화는 극과 실제의 경계를 넘나든다. 특히 마약으로 붕괴된 가족을 실제로 경험한 두 사람의 배우가 그것을 연기해 몰입도를 높인다. 마약 중독 문제가 심각한 노르웨이 사회를 꼬집으면서 영화는 힘 있게 현실에 발을 딛는다.
라파엘 마누엘 감독, <Filipiñana 필리피냐나>
영화는 불균형한 세상을 골프장에 비유해 보여준다. 일한 지 일주일 된 신입 ‘티 걸’ 이사벨의 시선에 맞춰 전개되며 사회 구조 안에서 약자의 위치를 조명한다. 그의 이동에 따라 넓게 배경을 비추는 샷은 정직하게 공간을 바라본다. ‘티 걸’은 골프를 치는 사람 앞에 쭈그려 앉아 공을 칠 때마다 새로운 공을 공급해주는 역할이다. 골프공을 세척하고 상자에 채워 넣는 것 역시 티 걸의 일이다. 한적한 골프장, 이사벨은 업무를 시작하기 전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이를 안 관리자는 그를 불러 골프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골퍼와 캐디뿐이라고 경고한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발견하곤 살짝 맛을 본 그에게 한 직원이 해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골프장 안에서 티 걸에게 허락되는 것은 없다. 그저 많은 규제만이 있을 뿐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출신 지역인 필리핀 북부 지방 일로코스에 관해 묻는 사람에게 골프장과 똑같이 생겼다고 답하는데, 이는 골프장이 사회 구조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사벨은 줄곧 텅 빈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에선 억눌림이 읽힌다. 그는 뒤집힌 샷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그 카메라 구도에서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시스템 전복에 대한 욕망이 드러난다. 그리고 노래방 장면에서 이사벨을 연기한 배우의 많은 것을 함축한 표정 연기와 이어지는 춤사위는 특히 인상적이다.
페넬로피 마티고 감독, <Seventh Floor 7층>
한 아파트 7층 집, 방문객이 찾아온다. 바베스의 오랜 친구이자 이웃인 뮈라엘이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깊은 포옹을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엔 슬픔이 걸려 있다. 내일은 바베스 딸 카를라의 장례식이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바베스는 카를라를 화장하기로 했다. 카를라가 할아버지를 화장할 때 관심 가지며 엉뚱한 말을 했던 것이 웃음 지을 수 있는 추억으로 남아 같은 방식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바베스는 그때처럼 딸이 가는 길도 볼 수 있고 거기 같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바베스의 남편 실뱅은 딸을 잃은 상실감을 부모님의 존재로 채우려 한다. 그가 부모님과 함께 살며 그들에 의지하면서 바베스는 홀로 슬픔을 견뎌야 했다. 담담해지려 노력하던 바베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마침내 억눌렀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춤은 몸을 매개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표현하는데, “넌 빛나! 우린 빛나!”라고 외치며 눈물의 춤을 선보이는 바베스 역시 내면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을 억누르던 우울의 무게에서 좀 더 가벼워진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추모와 망각의 밤을 지새운다. 새벽이 찾아오고 뮈라엘이 떠나기 전, 바베스가 이제는 필요하지 않은 딸의 물건을 친구의 딸에게 주라며 건넨다. 어두운 집 안 다시 홀로 남은 바베스의 뒷모습에선 쓸쓸함과 공허함이 감돈다. 그리고 차분해진 공기와 조금은 덜어진 듯한 슬픔이 유영한다.
켈리 캠벨 감독, <An Encounter 우연한 조우>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 그의 뒷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며 영화가 시작된다. 다리 밑에서 두 명의 소년이 옷을 갈아입는다. 학교를 빠지고 땡땡이를 치기 위함이다. 두 사람의 일탈은 시작부터 다툼으로 삐걱대지만, 이내 학교를 벗어났다는 자유로움 때문인지 표정이 한층 밝아진다. 지나가는 어른이나 경찰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도로에서 떨어져 강을 향해 걷는다. 항상 말이 없던 소년은 친구 제이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빠와 애인이 외국으로 이주할 거라는 말을 들어 아빠의 애인이 밉다는 이야기다. 이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가정과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 소년을 보여준다. 집에 언제 가냐는 제이의 질문에 소년이 안전할 때라고 답하자 친구는 그게 언제냐고 묻는다. 그 말에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불안한 소년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아이들은 돌을 집어 던지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경찰을 발견해 도망가기도 하며 계속해서 걸어간다. 학교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두 소년은 푹푹 찌는 햇살 아래 어느 풀숲에 누워 휴식을 취한다. 고요하고 한가로우며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평화는 지나가는 한 성인 남성과 우연히 만나며 부서진다. 제이가 자리를 뜬 사이 남성은 위협적인 분위기로 소년을 짓누르고, 소년의 얼굴은 두려움에 젖는다. 남성을 피해 도망친 소년은 친구와 함께 드넓은 바다를 마주한다. 안도감과 동시에 허탈함이 밀려온다. 고요하게 잔인한 세상은 막막하고, 소년은 그저 멍한 얼굴이다. 이제 소년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요한 타퍼트, 구스타브 에거스테트 감독, <The Last Marriage 마지막 결혼생활>
좀비 사태가 벌어지고 계속 일상을 이어가는 부부가 있다. 밤중에 집 안으로 들어온 좀비를 봐도 두려움보다는 귀찮음이 앞선다. 그들은 마당에 전기 충격으로 좀비를 막을 철조망을 설치하고, 무기를 갖춰 좀비가 출몰해도 능숙하게 해치운다. 마치 벌레를 잡듯 간단하다. 좀비가 된 자식 알리스를 마당 창고에 가둬놓은 채 창밖에서 알리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도 하며 좀비가 퍼진 세상에 적응해 살아간다. 이제 좀비는 부부의 생활을 위협하지 못한다. 그들이 고민하는 것은 계속해서 수리해야 하는 집과 만족스럽지 않은 성관계다. 어느 날 아내 마리는 좀비가 없는 마을이 있다는 지인의 엽서를 받는다. 새로움이 없는 일상에 질린 그는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남편 얀느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얀느는 마리와 다투는데, 이때 좀비 떼가 담을 부수고 마당을 습격한다. 부부는 좀비와 전투하며 그보다 뜨겁게 이혼 문제로 싸움을 벌인다. 두 전투가 동시에 맞물리면서 힘 있는 장면이 완성된다. 좀비 세계에서 좀비가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흔들리는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는 극한 상황에서의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의외성으로 유쾌함과 신선함을 선사한다. 팬데믹의 시대와도 잘 어울리는 설정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국제경쟁 섹션은 총 8개로 나눠 상영된다. 이 글에서 소개한 ‘국제경쟁 1’ 부문은 오는 10월 15일 금요일, 10월 16일 토요일에 만날 수 있다. 온라인 예매는 씨네큐브, YES24에서 할 수 있으며 당일 현장 구매도 가능하다.
글: 데일리팀 유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