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상황 속 마주하는 내밀한 정서 – 국제경쟁5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인간은 어떤 감정을 마주할까. 국제경쟁 5 섹션의 영화는 각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고통스러운 순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 자기 부정의 시간, 불운이 켜켜이 쌓이는 일상, 아이를 잃은 슬픔, 멸망을 앞둔 세상이라는 설정을 통해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사람의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창 시앙 안 감독, <Asphyxia 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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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자신을 집 앞에서 기다리던 남성과 만난다. 사과하며 붙잡는 남성을 뿌리치고 집 안으로 혼자 들어가는 여성,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하는 곳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겁에 질린 여성은 남성에게 도와달라는 문자를 보낸다. 두 사람은 사이가 틀어져 별거 중이던 부부다. 남편 데쉰은 아내 쉬안의 문자를 보고는 집으로 곧장 달려온다. 그는 내부에 숨어있던 강도를 발견하고 몸싸움을 벌이는데, 이때 강도가 의식을 잃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쉬안은 두려움에 떤다. 세상은 강도를 진압하고 아내를 구한 영웅이라며 데쉰의 이야기로 떠들썩해진다. 강도는 며칠간 응급 치료를 받다 결국 사망하고, 한편에서는 데쉰의 과실 치사 혐의가 도마 위에 오른다. 쉬안은 강도 사건 이후로 다시 데쉰과 함께 잘 지내는데, 계속해서 불안감을 느낀다. 사망한 강도에 대한 부채감처럼 비치던 감정의 실체가 영화 후반에 드러난다. 쉬안은 과거 데쉰이 행사한 폭력의 피해자로 그 기억이 상기되자 트라우마로 괴로워한 것이다. 데쉰의 과잉 방어로 강도가 의식을 잃기 전, 쉬안과 눈을 마주친다. 이는 쉬안이 폭력의 상황에서 자신의 기억을 읽어내게 하고, 피해자로서의 두 사람을 연결한다. 기자들의 요청으로 강도 진압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데쉰을 바라보는 쉬안은 그 모습 위로 자신의 피해 경험이 겹쳐져 읽힌다. 트라우마를 겪는 인물의 심리가 강렬하게 표현된 음향은 관객의 몰입과 이해를 돕는다.

 

알렉산드라 마요바 감독, <Washing Machine 세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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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하고 사랑하라.” 간단하고 명료한 소개의 애니메이션 영화 <세탁기>는 짧지만 강렬하고 단순하면서도 유쾌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단색 배경과 미니멀한 공간 안, 선을 이용한 간결한 그림체로 표현된 한 남성과 세탁기가 있다. 단순한 그림과 원색을 활용한 다채로운 색감은 시작과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감독은 색감과 관련해 Joan Miro와 Wassily Kandinsky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남성은 빨래를 시작하면 엄청난 진동으로 말썽인 세탁기를 고치려고 한다. 감독은 실제로 자신의 오래된 세탁기가 세탁할 때마다 욕실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이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에서 이야기를 출발시켰다. 감독의 예상대로 고장 난 세탁기의 이미지는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인간관계를 남성과 세탁기의 모습에 유머러스하게 비유하고, 일상에서 흔히 보는 가전제품을 활용해 예상치 못한 리비도적 의미를 생성해낸다. 세탁기를 고치기 위해 방문한 수리기사가 그것을 붙들고 애쓰는 모습, 남성과 세탁기 옆 휴지 걸이와 휴지의 모양새 등은 쉽게 성적 비유를 읽어낼 수 있게 한다.

 

사라 하카라이넨 감독, <Silence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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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는 한 남성,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은 실제 소아성애로 괴로움을 겪는 알렉시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문제적 화두를 던진다. 알렉시의 요청으로 영화에서 그의 얼굴은 공개되지 않고 배우가 화면에 대신 등장한다. 오랜 시간 자신의 성적 욕망을 감추고 살아온 그는 침묵을 깨고 인터뷰에 응했지만, 여전히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닐지 걱정한다. 아동에게 성적 욕망을 품는 일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일로, 그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음으로 인해 사회에서 외면당할까 두렵다. 알렉시는 처음 자신의 성향을 알게 된 계기와 자신을 부정하며 혼란스럽고 괴로웠던 시간을 회상한다. 극단적 생각까지 들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리고 아이를 해칠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며 그런 짓을 하고는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하지 못해 치료로 10년이 지난 시점에 받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이 찾아온다. “아무에게나 물어보세요. 절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떤 기분일지.” 영화는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젤라 하슬러 감독, <On Solid Ground 온 솔리드 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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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평온하게 헤엄치는 엘리의 모습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채운다. 그렇지만 그 평화는 금세 깨져버린다. 더운 여름날, 따가운 햇볕보다도 불쾌한 일의 연속이 그를 괴롭힌다. 수영을 마치고 나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는 엘리에게 길가의 한 남성이 수영장이 아니지 않냐, 호수에 가면 아이스크림이라도 생길 텐데 왜 가지 않냐며 시비를 걸어온다. 일상을 보내고 돌아가는 버스 안, 이번엔 한 무리의 대화가 그의 귀에 들어온다. 여성에게 계속 재킷을 벗으라고 강요하는 남성과 싫다는 여성이 실랑이를 벌인다. 그 말을 듣다 못 한 엘리가 상황에 개입하는데, 여성은 엘리의 도움을 거절한다. 친구를 찾아가 수영하러 가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해 혼자 돌아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다리에서 잠깐 쉬는 도중 차로에 자전거 열쇠를 떨어뜨린다. 그것을 찾아보려 해도 빠르게 지나가는 차의 클랙슨 소리만이 귀를 찌르고, 그는 끝내 열쇠를 찾지 못해 자전거를 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던 중 차를 타고 지나가던 남성이 엘리의 기분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든다. 남자는 치근덕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반응하지 않는 엘리에게 위협적으로 군다. 크고 작은 불운이 계속되는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는 겨우 안정을 되찾으려 하는데, 이마저도 동거인과의 마찰로 깨져버린다. 이에 애써 억누르던 서글프고 분통한 마음이 한계에 도달한다. 엘리가 소리를 지르며 프라이팬을 던지는 엔딩 이후 깔리는 록 음악은 실컷 폭발하고픈 엘리의 심정을 대변한다. 영화는 일상에서 겪을 만한, 특히 여성이 마주하기 쉬운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줄리엔 헨리 감독, <Lynx 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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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로 위를 달리는 마리의 차 ‘링스’. 경주 과정에서 엉망이 된 차에 마리의 남편 토니는 그것을 폐차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리는 다음 라운드도 할 거라고 우겨보고, 수리해 타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부부인 두 사람의 대화는 묘하게 날이 서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집에 친구 보리스가 방문한다. 아이의 방에서 아이의 물건을 만지며 슬픈 얼굴을 하던 마리는 보리스가 ‘그 사람’을 찾아냈다는 걸 알고 토니과 친구들을 함께 따라나선다. 그 사람은 바로 부부의 아이가 목숨을 잃게 만든 뺑소니 사건의 범인이다. 그 사람을 눈앞에 마주하자 마리와 토니는 분노에 휩싸인다. 토니가 총을 겨누기까지 하지만, 쏘지는 못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그것은 경주로 위를 달리는 것이다. 마리와 토니는 뺑소니 범인을 태울 고물차를 만들고, 핸들에 아이의 사진을 붙여놓는다. 세 대의 차가 경주로 열 바퀴를 달린다. 긴박감 넘치는 복수의 질주가 시작된다. 마리의 차 링스처럼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많이 망가져 버렸다. 그 상태의 차를 억지로 계속 끌고 가려고 하면 안 좋은 끝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묵은 감정을 폭발시키지만, 파국을 맞이하기 직전 결국 멈춰 서기로 한다.

 

타나시스 심피니스 감독, <Escaping the Fragile Planet 부서지기 쉬운 세상에서 탈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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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안개에 잠식돼 폐허가 된 도시, 몇 시간 후면 세상이 멸망한다. 한 남성은 창밖을 바라보다 걷고 싶은 맘에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나간다. 그는 걷던 도중 길가에 버려진 새의 사체를 보고 겁을 먹는다. 이때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오고, 그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돌린다. 도착한 곳은 지하에 있는 레코드숍, 그곳엔 한 남성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그는 남은 시간을 두려움에 떨며 보내고 싶지 않아 공포에 젖은 가족들과 헤어져 하고 싶은 일을 하던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전쟁 당시 만들어진 구덩이를 수영장처럼 만들어 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어디서든 놀 방법을 찾아내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세상의 밖으로 나가 마스크를 벗어 던진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핑크빛 안개에 뒤덮인 세상이 그들이 함께 사랑하고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되는 순간이다.

 

국제경쟁 섹션은 총 8개로 나눠 상영된다. 이 글에서 소개한 ‘국제경쟁 5’ 부문은 오는 10월 17일 일요일에 만날 수 있다. 온라인 예매는 씨네큐브, YES24에서 할 수 있으며 당일 현장 구매도 가능하다.

 

 

글: 데일리팀 유소은

2021년 10월 16일 / In Daily News-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