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심사단 리뷰 #1
1. 내부의 적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했던 그 해에, 파리에선 민주주의를 쟁취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안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면서, 밖으로는 다른 나라의 자유를 박탈했던 제국주의의 역사.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그대로 담아낸다. 한때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매국노’였던 이들에 대해 비난과 판단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영화들은 시대에 흔들려 그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던 이들의 모습을 담아, 비극적인 순응의 역사들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내부의 적도 그중 하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심문하는 자와 받는 자 둘 다 알제리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를 대변한 알제리인은 종교를 필두로 발생할 테러 모의를 우려하며, 회유와 협박을 오가는 질문을 던진다. 국적취득 신청인은 단지 이슬람교의 알제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고할지 모를 이웃들의 이름을 말하도록 강요당함에 비난하다가도 동요된다. 각자에게는 이유가 존재했고, 최근 IS가 저지른 각종 테러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는 비단 질문자를 매도할 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에 이른다. 어찌 보면 역사의 피해자는 그 둘 모두가 아니겠는가. 결국 가족의 안위를 위협당한 신청인은 죄책감 속에 이웃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에 이 영화는 조심스레 의문을 던진다. 질문자와 신청인, 그 둘은 다른 입장이었지만 결국 같은 내부의 적이 된다. 의도나 목적을 떠나 특정 소수, 때로는 다수가 ‘무언가’로 지칭되는 순간의 무게감은 비슷한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 마냥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취조 영상 프레임 속 시간이 반복될 것만 같은 여운을 남긴 채, 펜 끝에 실린 이름들이 부를 또 다른 이름들을 떠올리게 된다. 순응과 반복을 넘어 역사를 만들었던 순간들이 새삼 위대한 초상으로 다가온다.
글 : 관객심사단 민소영
2. 오발탄
휑뎅그렁한 박스 하나로부터 시작한 영화 <오발탄>. 사실 오발탄 하면 현대문학 이범선의 「오발탄」이 먼저 생각이 난다. 그 「오발탄」에서 철호는 어려운 시기에도 양심을 지키며 살다가 오발탄이 된 반면 이 영화의 시환은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복수를 하려다 실패해 그 좌절감 때문에 오발탄이 된다. 아마도 시환은 자신의 폭탄이 터지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양이가 어찌됐는지 묻는 ‘I’의 질문에 그렇게 뜸을 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이 오발탄이라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스위치를 누른다.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오발탄」의 철호가 죽어가며 하는 생각과 같이 부당한 세계에 ‘쏘아진’ 오발탄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은 가야하는지도 모르지만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 이 일방적인 ‘가는’ 행위가 「오발탄」에서는 택시에 타는 행위로 이 영화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는 행위로 반복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는 불발(不發)되지 않고 오발(誤發)된 자들의 숙명인 것이다.
극중 시환은 계속에서 ‘I’ 라는 인물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I는 말 그대로 ‘나’ 이다. I는 복수하려는 시환(ego)에게 다른 학생들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초자아(superego)’이면서 시환을 부추기는 ‘원초아(id)’ 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한 부분만 제외하면 ‘I’는 원초아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문제는 이 원초아를 통제할 초자아의 부재에 있다. 초자아는 부모님의 목소리 더 나아가 사회 공동체의 규범이 내면화 된 것이다. 극 중 시환은 항상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크게 듣고 다닌다. 이는 사회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시환이 하는 행동 중 의사소통이라 할 수 있는 행위는 ‘I’ 즉 초자아와의 메시지이다.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 하지 않은 시환은 원초아의 부추김에 너무도 쉽게 넘어간다. 하지만 초자아의 붕괴는 곧 시환이 속한 사회의 규범의 붕괴를 뜻하기도 한다. 시환이 규범의 내면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내면화할 규범 자체가 너무도 부조리하다면 마치「오발탄」의 영호가 그랬듯 초자아는 자신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초자아를 버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원초아를 따랐던 소년의 욕망이 좌절(오발)되는 과정을 다룬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글 : 관객심사단 진수범
3. 루트 B96
기대는 반 박자쯤 어긋난다. 어긋나는 이유는 매번 다르다. 고민이 너무 깊었다거나 상대와의 간격을 잘못 짚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비웃음을 참지 못했거나, 찰랑거리는 술기운에서 핑계를 찾기도 한다. 손 뻗으면 닿을 거 같은 반 박자의 아쉬움이 미련과 후회를 남긴다. 울프는 록 스타다. 밴드의 일원으로 성공적인 투어를 하던 중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고향은 여전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하지 않다.
미뤄뒀던 잠은 옆집 아저씨의 잔디 깎는 소리에 아침 일찍 실패하고, 식탁에는 부모님이 스크랩해둔 투어에 대한 기사가 어지럽게 놓여있다. 이웃들은 그를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동네 청년이 아니라 금의환향한 록 스타로 맞이한다. 옛 연인의 눈빛에는 부담스러운 반가움만 한 가득이고, 밤새 어울리던 옛 시절을 재현하려던 그와 다르게 친구들은 내일의 출근이 무서운 생활인이 되어있다. 친구의 부인은 그를 밴드를 쫓아다니는 여자들과 방탕하게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는 자신을 록 스타가 아닌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고향에서 그는 오히려 이방인이 된다. 그를 밴드의 베이스 연주자가 아닌 동네 청년 울프로 봐주는 사람은 그를 늘 한심하게 바라보는 부지런한 옆집 아저씨뿐이다. 그는 휴가 내내 고향 사람들과 빗겨나간다.
이제 울프에게 고향은 더 이상 편히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정류장 중 하나가 된다. 서로의 기대가 어긋나는 불편한 상황은 그를 점점 더 고향에서 밀어낸다. 숙취 같은 휴가의 끝에서 그는 또 다른 오해를 만들고 미련을 남긴다. 투어 버스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축제가 끝나고도 눈치 없이 남은 풍선 같다. 그가 왔던 일을 마을은 천천히 바람 빠지듯 치워갈 것이다. 다음 축제는 기약이 없다.
글 : 관객심사단 김민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