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트리트먼트
읍내 보습학원에서 일하는 유리는 항상 5시가 가까워지면, 용천리행 막차를 타기 위해 부리나케 나선다. 읍내와 용천리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4차례로 5시가 막차다. 작년부터, 동료들이 집을 읍내로 옮기라고 했지만, 용천리에는 부모님이 남긴 집이 있고, 그다지 큰 불편함은 없다.
5시가 다가오면 막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정류장에 나타난다. 나타나는 사람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주섬주섬 읍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똑같은 가방과 옷차림으로 나타난다. 읍내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늦어서야 읍내 시장에서 야채나 과일을 구입한 중년의 여자들. 다만 취한 사람들만이 날마다 바뀔 뿐이다.
버스가 정류장에 다가왔다.
남수가 막차를 타기 위해, 신호등의 빨간 불을 빤히 보면서도 횡단보도를 건넌다. 지나가는 차들이 갑자기 멈추며 빵빵거린다. 정거장으로 달려오던 장우는 의도치 않게 행인을 밀쳤고 사과하지 못했다. 그들은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옳은 일을 무시해야 했다.
유리는 그런 장우와 남수를 바라보며, 정류장 뒤편 어두운 골목에서 마지막 담배를 피운다.
버스 안. 맨 뒷좌석 옆 차창 유리에 금이 가 있고, 그 모양대로 투명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여져 위험스럽게 보인다. 그 옆엔 직접 손으로 휘갈겨 쓴 ‘창에 가까이 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 사람들은 맨 뒷좌석을 피해 앉아 있다.
유리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멍하니 그 창을 내다본다. 남수와 장우는 서로 핸드폰 하나에 고개를 처박고 철 지난 예능프로를 보고 있다. 버스 운전기사 원영은 알 수 없는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리고 있다. 졸고 있는 고등학생. 중년 여자는 중요한 것이 든 것 마냥 시장바구니를 꽉 움켜쥔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유리는 그들을 모르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버스는 어느새 시내를 벗어나 시골 국도를 지나친다. 버스 기사가 운전을 거칠게 하는 통에 급정거와 급출발을 반복한다. 커브를 돌 때마다 사람들은 앞좌석을 잡을 정도로 온몸을 들썩인다.
과거 막차 버스는 가끔 출발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일찍 출발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막차를 놓칠 때면 더블을 외치거나 아니면 근처 싼 모텔에서 자라는 둥의 선택을 늘어놓는 택시 기사의 당당함에 기분이 나빠 한동안 머뭇거렸다. 결국 선택은 PC방에 들러 좀비 영화를 보다 잠들고는 끼익 거리는 의자의 부산한 움직임 소리에 잠에서 깨곤 했다.
끼익 거리며 버스가 갑자기 속도를 내며 속도를 줄인다. 유리의 몸이 앞으로 심하게 쏠리는데, 유리가 귀에서 이어폰을 뺀다.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장우와 남수의 눈이 마주친다.
장우, 남수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어본다.
“형! 방금 뭐 이상하지 않았어요? 뭐 처박은 것 같죠? 방금?”
“그런 것도 같은데. 근데 아무것도 안 보여.”
“느껴졌는데. 뭐 박았는데. 소리도 났잖아요. 형님은 못 들었어요?”
“모르겠어. 버스 소음이 심하잖아. 정 이상하면 니가 가서 물어봐.”
장우가 버스 기사와 두어 마디를 주고받다가 자리로 돌아온다.
“아니라는데, 아무 일 없다는데요. 근데 아니면 어떡합니까. 거짓말이면”
“에이, 운전한 사람이 아니라는데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뺑소니치고 가는 거면 실토를 하겠습니까. 저 사람이.”
장우는 여전히 그 상황에 의문을 가지고 있고, 남수는 버스 기사가 자기를 의심한다고 생각했을 거라며, 나쁜 감정을 자기에게도 가지는 거 아닌지 걱정한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버스는 국도에 난 비상활주로에 진입하였다.
유리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잠시 동생 주리가 서울에서 용천리 집을 찾아왔던 때를 떠올린다. 유리는 그날 막차를 놓쳐버렸다. 학원은 큰 자물쇠가 묵직하게 입구를 지키고 있다. 결국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비상활주로를 걸을 때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가늠할 수 없는 소리. 하늘은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우울한 잿빛으로 어두워지고 있다. 무서워졌다. 유리는 소리 내어 구구단을 외우다가, 암산으로 두 자릿수 곱셈을 하고 끝말잇기를 한다. 생각나는 크리스마스 캐럴도 모두 부른다. 그래도 비상활주로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유리는 눈 위에 찍힌 큰 발자국을 발견하고 안도감이 들었으나, 저 멀리 논두렁에 처박혀 있는 검은 덩어리를 맞닥뜨리자 이내 공포감을 느낀다. 유리는 달리기 시작한다. 미끄러져 넘어지고 논두렁에 처박힌다. 유리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린다.
탁. 탁. 탁. 탁. 유리의 발걸음 소리가 주변의 산의 골짜기를 휘감아 울린다.
탁. 탁. 탁. 탁. 장우가 손가락으로 좌석의 팔걸이를 톡톡 치며 뭔가를 떠올리고 있다.
“만약 동물을 친 거면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동물 친다고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근데 저 아저씨는 아예 딱 잡아뗐다니까요. 이 동네 버스 기사들이 운전을 얼마나 지랄 맞게 하는지 형님도 알잖아요. 내가 진짜 멀미가 나서 죽겠는데 민원을 넣어도 고쳐지지도 않고. 버스 회사에서 제대로 교육을 안 시켜서 그런 거잖아요. 여기 교통을 한 사람이 다 독식하고 있으니까.”
“하루 이틀 일이냐. 그러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너처럼 그렇게…”
“어떻게 그러려니 합니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형님 말대로라면 안전 운전하는 기사의 버스를 탔을 때는 ‘아, 오늘은 내가 운이 좋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까?”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남의 인생 말고 니 인생이나 잘 살라고. 남 일에 함부로 간섭 말라는 거야”
“이게 어떻게 간섭입니까. 내가 탄 버스에서 벌어진 일인데.”
남수가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빈정거릴 때, 끼이잉~ 버스가 소리를 내며 크게 휘청거린다. 핸드폰에 딸려 나온 지폐 몇 장과 담뱃갑이 바닥에 떨어진다. 남수는 바닥에 떨 어진 그것들을 주우려는데 버스가 급정거를 한다. 남수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의자에서 떨어진다. 중년 여자의 장바구니에서 나온 사과 대여섯 개가 운전석 앞까지 데굴데굴 구른다.
“이봐요, 아저씨!”
“에이 씨, 여기 왜 신호를 만들어놔서. 이런 데 신호등이 있으면 사고가 더 난다고.”
기사가 들으라는 듯 도리어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유리는 앞 좌석을 붙들고 주변 창 밖을 내다본다.
창 밖 빨간 표지판에 하얀 글씨로 적혀진 ‘사고다발지역’ 문구.
“형! 여기 봐요. 여기 사고 많이 나나 보네.”
“여기 신호등 생기기 전에도 사고 많이 났어. 이런 거 생기면 뭐해! 사람들 아주 사고를 다발로 저지르고 다니는데.”
유리는 지난가을 석양 무렵의 한때를 떠올린다.
(현재 ‘사고다발지역’의 표지판이 있던 근처와 비슷하다.)
택시에서 내린 유리가 달려오다 급한 숨들을 토해내는데 갑자기 멈춰 선다.
그리고 누런 논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 들판 사이에 몇몇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다.
벼들을 헤치고 다가가면 들판의 논 사이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
그 주변의 벼 이삭마다 피가 튀어 있다.
버스 안. 넘어진 자리에서 지폐를 줍던 남수는 핸드폰 액정을 켜서 지폐에 빛을 비춘다.
“돈에 왜 이런 게 써 있냐.”
유리는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시선을 돌린다. 남수는 지폐 여러 장에 (연도가 없는) 오늘 날짜가 적혀 있다며 투덜거리고, 장우는 돈을 어디서 받은 거냐며 흥분해있다.
“모르지.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이 길에서 사고가 있었나. 목격자 찾겠다고 누가 써 놓은 건가. 돈이란 게 돌고 도니까요.”
“너 같으면 이런 장난 같은 거를 보고 신고를 하겠냐?”
“누가 이런 걸 장난으로 합니까. 얼마나 간절하면 이러겠어요.”
남수는 재수가 없다는 듯 지폐를 장우에게 넘기자 장우는 남수에게로, 남수는 바닥에 버린다.
그때, 유리가 손을 뻗어 그 지폐를 집어 든다.
유리는 얼굴 가까이 지폐를 대고 그 위에 적힌 글자를 읽는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유리는 중얼거린다.
“죄책감… 더 맞는 말이 분명 있어. 분명히 있는데도 자기가 모르거나 사람들이 외면해서 만들어내지 않는 단어, 그거.”
“뭐라고요?”
“죄책감 다음에 오는 단어.”
유리는 다시 지난가을 석양 무렵의 한때를 다시 떠 올린다. 유리는 엎드려 쓰러져 있는 누군가 (주리(여, 26))를 껴안고 있다. 석양은 유리의 등을 물들고 있다.
차창 너머에서 들어온 붉은 석양이 유리의 얼굴을 가득 품고 있다.
남수, “인마 그만하라니까. 궁금하면 니가 다시 거기 가보면 될 거 아냐.”
장우, “가요? 어디를요? 아까 거기를요? 어떻게요? 이거 막찬데.”
“내일 가서 확인해보면 될 거 아냐.”
“형님, 이거는 막차고 내일까지는 아무도 안 탑니다. 그럼 저 아저씨가 오늘 밤에 차에 남은 흔적을 싹 지우고 현장에 돌아가서 시체든 증거든 없애버리면 결국 뭐만 남겠어요. 우리만 남는다 이거죠. 근데 우리는 증거도 뭐도 없고 느낌만 있고.”
“또라이 새끼 그만해.”
“우리가 대체 뭘 타고 있는 거야.”
남수는 상스런 욕을 하며 장우의 머리를 내려친다.
창밖으로 용천리의 작은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로등 간격이 좁아지자 버스는 아주 조금 속도를 죽인다.
유리는 지폐를 구겨 잡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창에 비친 유리의 얼굴. 눈가에 눈물을 머금는 유리.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등으로 고인 눈물을 훔친다.
아마 유리는 내일을 생각할 것이다. 여전히 막차를 탈 것이고 장우와 남수를 만날 것이다.
서로 알지만 아는 척하지 않을 것이다. 버스는 비상활주로를 달릴 것이며, 그 길을 지나며 유리는 다시 떠올릴 것이다. 큰 발자국과 검은 덩어리들을. 그리고 벼 사이에 꽁꽁 숨어버린 동생 주리를. 그렇게 많은 밤, 유리는 죄책감 다음에 오는 단어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런 날을 살고 또 살 것이다. 막차를 탈 것이다.
캐스팅 희망 – 등장인물 소개
유리(여/29세)
20대 후반-30대 초반 가능. 과거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으나 여전히 현실과 마주하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계약직 직원. 읍내 보습학원에서 계약직 강사로 근무. 매일 읍내와 용천리를 하루 3번씩 오가는 버스를 타고 다닌다. 조용하고, 평범하며, 생각이 깊은 성격이다.
장우(남/26세)
20대 중후반. 카센터 근처 핸드폰 매장 직원. 남수의 후배. 어떤 상황에 목도했을 때 주로 의견을 내거나 문제 제기를 하는 성격.
남수(남/28세)
20대 후반. 카센터 직원.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함.